영화 〈변호인〉은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영화는 ‘노무현’과 ‘부림 사건’을 큰 줄거리로 삼았다. 속물 변호사가 거리의 변호사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영화적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한 허구가 포함되었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실화와 허구의 경계선에 대한 궁금증도 늘었다. 실존 인물들을 통해 그 경계선을 쫓아가 보았다.

영화의 주요 소재가 된 부림 사건은 1981년 부산 지역 최대 공안 사건이었다. 공안 당국은 영장 없이 연행해 두 달 가까이 조사한 끝에, 교사·약사·농협 직원·대학생 등 22명을 계엄법·국가보안법·집회 및 시위법 등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부산 양서판매이용 협동조합을 통해 독서 모임을 가지거나, 다방 등에서 군사 정부를 비판하거나, 미국·중국 등 국제 정세를 이야기한 이들은 사회의 불안을 야기하거나 북한을 고무·찬양한 죄를 뒤집어썼다.

영화 <변호인>(위)의 소재가 된 부림 사건은 1981년 부산 지역 최대의 공안 사건이었다.

‘통닭구이가 만든 공산주의자’

영화 〈변호인〉에서 진우(임시완 분)의 실제 모델인 송병곤씨(56)는 그때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부산대 법대생이었던 송씨는 현재 법무법인 ‘부산’의 사무장이다. 송씨는 “일종의 트라우마인지 심리적인 방어기제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재판 장면은 드문드문 기억나고 두 달 넘게 갇혀 있었던 대공분실에서 통닭구이(깍지 낀 손을 무릎 아래로 집어넣고 그사이 막대기를 넣어 거꾸로 매달아 몽둥이로 때리는 고문) 같은 굵직한 고문을 당한 사실 정도가 떠오른다”라고 말했다.

그런 그도 고문이 있던 날과 없던 날의 차이는 33년이 지났지만 뚜렷이 기억했다. 영화에서처럼 밥을 주는지 안 주는지에 따라 몸이 먼저 알았다고 한다. 영화 속 진우가 급격한 체중 감량에 대해 증언하며 “한 번은 고문을 받고 구토를 심하게 하자, 그다음 날부터는 고문이 있는 날은 밥을 주지 않았다”라고 말한 내용은 사실이라고 했다.

1981년 당시 공안정국은 교사·대학생 등 22명을 영장 없이 연행해 구속 기소했다. 위는 영화의 한 장면.

고문당하는 피해자를 응급처치하다 이들의 고문 사실을 용기 있게 법정 증언하는 군의관 윤 중위의 존재는 허구다. 양심선언을 한 군의관은 없었지만, 실제로 고문 뒤 치료해주던 경찰병원 의사가 있었던 건 맞다.

부림 사건 피해자이자 현재는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고호석씨(58)는 “고문당한 다음 상태가 많이 안 좋을 때는, 경찰병원 젊은 의사가 와서 치료해줬다. 그때 그 의사는 영화 속 윤 중위처럼 우리가 고문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인데, 지금 누군지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고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대공분실에 있으면서 왼쪽 엄지발톱을 잃었다. 한여름에 발톱 썩는 냄새가 나자, 고문관이 의사를 데리고 왔다.

당시 수사 담당자였던 최병국 당시 검사(극중 강 검사, 조민기 분)는 고문 사실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사IN〉과의 전화 통화에서 “나한테 조사받을 때는, 내가 막내 동생처럼 대하면서 곰탕도 사주고 잘해줬더니 고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변호인이 선임되고 법정에 가니까 그때부터 고문 이야기를 하더라”고 말했다. 최씨는 그때 사건이 지금 다시 불거지는 것에 대해서는 “그 사람들(부림 사건 피해자)이 파렴치한 절도범도 아니고, 사회를 변혁하겠다는 꿈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그런 (고문당했다는) 거짓말은 안 했으면 좋겠다. 도리어 사과를 하려면 그 사람들이 (나에게) 해야 한다. 내가 자기들한테 욕을 한마디 했나, 윽박지르기를 했나”라고 말했다. 공안통 최병국 검사는 16·17·18대 국회의원(한나라당)을 지냈다.

ⓒ연합뉴스영화에서 조민기(위 왼쪽)가 연기한 최병국 당시 검사(오른쪽)는 <시사IN>과 통화에서 고문 사실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부림 사건 피해자인 송병곤씨와 고호석씨는 2011년 고문 당사자인 경찰 이 아무개씨와 또 다른 이 아무개씨를 고소했다. 이들이 영장도 없이 끌려가 고문을 당한 곳은 ‘내외문화사’라는 간판을 단 부산경찰청 산하 대공분실이었다. 당시 ‘전무’(분실장)로 불리던 이 아무개씨와 ‘상무’로 불린 또 다른 이 아무개씨 모두 고소 당시 경찰을 떠난 상태였다. 애초에는 부장으로 불리며 가장 많이 고문을 했던 송 아무개씨도 함께 고소하려 했지만, 고소 당시 송씨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어 대상에서 빠졌다. 고씨가 대공분실에서 조사받으며 조서를 쓸 때 봤던 이름을 기억해뒀다가 뒤늦게 고소를 했지만, 수사기관은 고소인 조사만 진행하고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고소장에 따르면, “초기엔 ‘잠 안 재우기’로부터 시작해 곡괭이 자루나 경찰 방망이 같은 도구를 이용해 신체 모든 부위를 폭행했다. 가장 잔인한 고문은 팔과 다리 사이에 곡괭이를 넣어 책상 위에 걸쳐 놓고 대롱대롱 매달아 팔과 다리 등을 경찰 방망이 등으로 집중 구타하는 것이었다”. 영화 속 장면과 똑같다.

부림 사건 피해자들은 1999년 재심을 신청했다가 기각된 끝에 2006년 재항고해 2008년 대법원으로부터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한 재심 결정을 받아냈다. 이듬해 2009년 부산지법은 재심에서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한 무죄를 내렸다. 집시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도 법이 개정되었다며 면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파기하지 않아 따로 결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국보법 위반 혐의에 대한 재심 절차는 현재 진행 중이다. 이 재심 사건을 문재인 변호사가 맡았다.

ⓒ연합뉴스2011년 4월 부림 사건 피해자인 당시 김재규 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과 고호석 전 전교조 부산지부장(왼쪽부터) 등이 30년 만에 고문 경찰관의 처벌을 요구하는 고소장을 검찰에 제출하고 있다.

영화의 극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가 외신 기자들의 법정 취재이다. 당시 외신 기자들이 직접 법정을 취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림 사건은 외신에 관심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당시 부림 사건 피해자 중 한 명인 송세경씨의 부인이 한국앰네스티에 글을 기고했다. 그 글이 영어로 번역돼 해외 잡지에 실리면서 외신은 부림 사건을 보도했다. 이 글 제목이 ‘통닭구이가 만든 공산주의자’. 글쓴이는 송씨의 부인이자 성교육 강사로 유명한 바로 구성애씨다. 현재 푸른아우성 대표로 활발히 활동 중인 구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영화에서 피해자 가족의 상징이 진우 엄마(김영애 분)로 나오는데, 그때 각 피해자 가족들 전부가 진우 엄마였다. 법정 안팎에서 싸우고 울고 소리치고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라고 말했다.

영화 속 진우 엄마처럼 구성애씨도 법정에서 공산주의자를 운운하는 검사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다 법정 소란 혐의로 감치 명령을 받아 또 다른 피해자 가족 3명과 부산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열흘간 갇혔다. “없는 죄를 만드는 법정에 항의한 게 도리어 죄가 되었다”라며 구씨는 당시 열흘간 단식 투쟁을 벌였다고 한다.

ⓒ노무현 사료관1985년 6월 부산의 한 강연회에 노무현 변호사, 김광일 변호사(오른쪽부터) 등이 참석했다.

“북괴 찬양 발언 자제해달라”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같은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기소된 영화 속 장면도 사실이다. 당시 공소장에 첨부된 책 목록을 보면 〈역사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리영희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와 잡지 〈창작과비평〉 〈월간조선〉 등이 있다. 고교 문학 교과서에 실린 〈삼포 가는 길〉(황석영)이나 현재 뉴라이트 활동을 하는 안병직 교수의 〈3·1운동〉이라는 책도 눈에 띈다. 다만, 당시 실제 공판에서는 영화에서처럼 변호인이 E. H. 카의 신원을 확인해준 영국 대사관의 편지를 공개한 바는 없다.

당시 수사부터 공판까지 담당했던 최병국 검사도 그때를 떠올리며 그런 책을 읽은 자체가 잘못은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시중에서 파는 책이 맞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며 “나도 그때 수사할 때 일부러 〈역사란 무엇인가〉 〈전환시대의 논리〉도 사서 읽어보았다. 얘들(부림 사건 피해자)한테 ‘선동적인 데 너무 집착하지 마라’ ‘젊음을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책을 읽고) 좌경 의식화 학습을 해서 북한을 찬양·고무한 게 문제다”라고 덧붙였다.

ⓒ노무현 사료관1992년 5월 노무현 변호사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부산 칠성시장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판결문을 보면, 이들이 한 찬양·고무 발언은 “광주는 고립되었으며 내란 상태에 들어갔다. 진압하는 살인 군대들이 무차별 살육전으로 광주 시민은 분노하여 운다(1980년 5월20일 발언)”, “광주 사태는 해결되었지만 그 진압 방법이 무차별한 살육전이었다(1980년 6월 초순쯤)”와 같은 수준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발언을 북한 찬양·고무로 본 이유는, 북한 방송 선전과 같은 내용의 말을 해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논리다. 그래서 노무현 변호사는 “알리하고 포먼하고 권투 시합을 하는데 김일성이 알리 편을 들었을 때 피고인도 알리 편을 들었다면 그것도 이적 행위냐”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법정에서 최병국 검사는 “북괴를 찬양하는 발언을 자제해주십시오!”라고 소리쳤다. 영화 속 그대로다.

부림 사건 기록과 공소장·판결문 등을 보면, 부림 사건 피해자들이 열었다는 집회에 선 강사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은, 기자 조갑제다. “1981년 2월27일 애린 유스호스텔 도서실에서 피고인 김재규, 송세경, 김희욱이 회원 몇 명과 함께 모여 초빙 강사 조갑제로부터 석유 문제에 대하여 ‘한국의 석유 탐사업체인 걸프와 칼텍스 회사의 이윤을 미 본국에 송금하는 사례와 석유 정책의 모순에 대한 비판’ 강연을 듣는 등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를 하였다.” 당시 부산에서 발행되는 〈국제신문〉 소속이었던 조갑제는 〈석유 사정 좀 환히 압시다〉(1979년)라는 책을 펴내는 등 포항 석유시추 사업의 허구를 파헤친 특종 기자였다.

구속적부심 법정이 바뀐 사연

1987년 9월23일 부산지방법원. 원래 오후 2시로 예정되었던 노무현 변호사에 대한 재판이 두 시간 미뤄졌다. 부산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노 변호사의 구속적부심 재판 장소를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선임계를 낸 변호사만 99명이라 원래 잡아놓은 법정이 작았다. 영화 〈변호인〉의 마지막 장면은 구속된 송우석 변호사 뒤로 선임된 변호사가 한 명씩 호명된다.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김광일 변호사(극중 김상필 변호사, 정원중 분) 평전인 〈참 멋진 놈 하나 만났디라〉에 이와 관련한 부분이 기술되어 있다.

“재판이 열리면 출석한 변호인을 확인하여 조서에 기재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부산의 변호사 수효가 많지 않아 법원 사무관이 변호사들의 이름을 다 알기 때문에, 재판장이 호명하지 않고 사무관이 알아서 조서에 기재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날도 재판장은 평소대로 변호인의 출석은 확인하지 않고 바로 인정신문을 시작하였다. 그 순간 김광일 변호사가 일어나 이렇게 (호명을) 요구했다. (중략) 결국 재판장은 장시간에 걸쳐 변호인을 일일이 호명하여 출석 여부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노 변호사의 혐의는 제3자 개입 위반이었다. 1987년 경남 거제 대우조선 옥포조선소에서 노동조합이 생기는 과정에서 노동자 이석규씨가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이씨가 사망했다. 노 변호사는 부검 입회 요청을 받아 거제도로 향했다. 유족에 대한 보상 합의 문제와 임금 협상 타결이 맞물리면서 현장 노동자들이 혼선을 빚자, 노 변호사는 장례식에 앞서 임금 협상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검찰은 노동쟁의에 제3자가 개입했다는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악법’이라는 이유로 지금은 사라진 법이다.

다만, 영화 속 장면에서 1987년 박종철군 추도집회에 앞장서는 송우석 변호사가 연이어 구속된 채 재판을 받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87년 2월7일 고문치사당한 박종철 진상규명 집회에 노무현 변호사가 앞장선 건 맞다. 부산 중구 남포동 부산극장 앞 시위에서 15분 동안 약식 추도회를 가진 다음 연좌 농성을 벌인 혐의로 노무현 변호사는 김광일·문재인 변호사와 함께 연행되었다. 문재인 변호사는 훈방되었지만 노무현 변호사의 처지는 달랐다.

검찰은 구속영장을 네 번이나 청구했다. 도주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었던 노무현 변호사에 대한 영장을 당시 당직이었던 한기춘 판사가 기각하자, 검찰은 하룻밤 사이 윤우정 부장판사·조수봉 수석부장판사·홍일표 부장판사 집까지 찾아가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의 기각으로 노 변호사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나 결국 같은 해 9월 대우조선 분규 개입 혐의로 구속됐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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