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경의 여여한 독서 소멸해가는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 김이경 (작가) 제주 동백동산은 세상의 소란 속에서도 고요하다. 하늘을 가린 울창한 나무 사이를 걷는다. 다리가 무거워질 즈음 걸음을 멈춘다. 발아래, 굵은 철망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컴컴한 구멍을 바라본다. 도틀굴이다. 70여 년이 흘렀어도 생생한 공포. 저 구멍으로 들어갈 때의 심정을, 굴속에서 귀를 세우고 하루 한시를 천년처럼 보냈을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 끝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이후 시간을 생각한다.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예전엔 싸움을 택한 이들의 시간을 생각했다. 그 치열함을 거울 삼아 살았다. 더 나은 돌봄을 위하여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대기업 임원으로 정년퇴직한 선배는 요양보호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두어 해 전 자격증을 딴 뒤 거의 쉬지 않고 방문 요양보호사로 일하는데, 자격증을 따는 이는 많아도 이렇게 -더구나 남성이- 열심인 경우는 많지 않아서 센터에서도 놀란다고 한다.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자부심을 갖고 즐겁게 일하는 선배를 보면 든든하다. 선배 같은 이가 많으면 내가 늙고 병들었을 때 집에서 편히 말년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그렇다고 내가 요양병원 같은 시설엔 절대 가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늙으면 여기저기 탈이 나고 병원 신 꿈꾸는 사람은 봄꽃처럼 아름답다 김이경 (작가) 봄 맞은 산에 오른다. 가쁜 숨이 닿는 곳마다 보랏빛 꽃들이 피었다. 제비꽃이다. 톡톡 벌어진 꽃송이가 밥 달라 조르는 새끼 제비들의 앙증맞은 입을 닮았다. 이래서 제비꽃인가 했더니 제비 올 때 핀대서 제비꽃이란다. 어쨌거나 작지만 어엿한 봄, 생명의 전령사다.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며 노래를 흥얼거린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조동진의 ‘제비꽃’이 인기를 끌 때 나는 그 노래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머리에 꽃을 꽂은 소녀라니 죽음이 내 삶에 질문을 던졌다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어느 날 죽음이 내 삶에 질문을 던졌다. 공부란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하는 것. 죽음 공부를 시작했다. 스무 해 만에 간신히 마무리하고 책 〈애도의 문장들〉을 썼다. 공부를 마치면 두려움과 슬픔에서 자유로워질 줄 알았다. 아니었다. 힘들게 공부한 보람이 뭔가, 회의가 들었다. 출간 뒤 몇 차례 북토크를 하며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절박하게 죽음과 애도의 의미를 궁구하는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소용없는 일을 한 건 아니구나 싶었다. 그래도 더 이상 죽음 책을 보고 싶진 않았다.평생을 함께한 어머니가 다른 세상으 몽테뉴에게 배웠다, 슬픔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는 걸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크든 작든 하나의 세계가 무너질 때 마음을 기울여 읽을 수 있는 문장은 많지 않다. 유명한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생의 마지막에 몽테뉴를 읽었다. 파시즘의 광기를 피해 찾아간 브라질의 셋집 지하실에서 몽테뉴의 〈에세〉를 발견한 그는 이 “체념과 물러남의 대가”에게서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에세이 형식의 전기 〈몽테뉴〉(한국어판 〈위로하는 정신〉, 안인희 옮김, 유유 펴냄)를 썼다. 전기는 미완으로 남았지만 남은 문장만으로도 그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기엔 충분하다.한 생애가 저무는 걸 지켜보며, 비슷한 심정 정치 혐오의 시대, 김대중을 기억하다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다큐멘터리 영화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를 보고 백남준에 대해 전혀 몰랐구나 싶었다. 알려고 한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피아노를 부수고 넥타이를 자르고 TV에 알 수 없는 영상을 띄우는 그의 작업을 나는 세상과 동떨어진 예술지상주의로 여겼다. 특히 조지 오웰의 비관적 전망에 딴지를 거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1984년 당시 날마다 (‘땡’ 하는 시보와 함께 ‘전두환 대통력 각하는’으로 시작하는) ‘땡전 뉴스’를 보던 입장에선 희망의 미래가 아니라 현실을 외면한 쇼일 뿐이었다. 한데 영화를 보고 소통을 향한 그의 무엇이 선함을 가능하게 하는가?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비를 피해 들어간 서점에서 〈비바레리뇽 고원〉(매기 팩슨 지음, 김하현 옮김, 생각의힘)을 만났다. 짐이 많았는데도 500쪽 넘는 책을 사고 말았다. “폭력에 저항하고 고집스레 예의를 잃지 않는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저자의 질문에 혹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연구하고 싶다는 저자처럼 나 역시 전쟁과 폭력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 얼마나 나빠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라면 이미 알 만큼 안다. 그 앎이 전쟁이나 폭력을 끝내는 데 아무 도움도 못 된다는 것도. 이제 나는 평화에 대해 알고 싶다. 내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싶다면 나무를 심자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새해 첫날이면 일기장 맨 앞에 다짐 혹은 소망을 한 줄로 적는다. 나만의 새해맞이 의식인데 그것도 언젠가부터 시들해졌다. 해마다 실천하지 못한 전년의 다짐을 되풀이하자니 맥빠질 수밖에. 한데 세밑에 만난 책 〈나무를 대신해 말하기〉 덕분에 새해 새 소망이 생겼다. 가슴이 뛴다.〈나무를 대신해 말하기〉는 아일랜드 출신의 식물학자이며 의학생화학자인 다이애나 베리스퍼드-크로거가 자신의 삶과 자신을 키운 켈트 문화, 그리고 50여 년간 연구해온 나무에 대해 이야기한 자전적 에세이다. 저자는 열두 살에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된 사연부터 아픈 역사가 주는 교훈, “용감하게 직시하라”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서점에 갔다가 고대하던 책을 만났다. 정병준의 〈1945년 해방 직후사〉. 보자마자 머리말도 읽지 않고 바로 샀다. 현대사 연구자 정병준의 역량을 알기 때문이다. 내용이 궁금해 근처 빵집에서 빵으로 점심을 때우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서문과 프롤로그를 읽는 데 한 시간여가 걸렸다. 천천히 오래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해방의 감격이 분단의 비극으로 귀결되는 아픈 역사를 대면하는 괴로움과 이런 연구자가 있어 다행이라는 고마움이 걸음마다 엇갈렸다.책은 해방 직후에 일어났으나 이제껏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비사(祕史)’로 가득하다. 숨겨진 살아서 대접받지 못한 이를 대접하는 ‘뒷전’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에는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을 선정해 발표한다. 하지만 나는 올해의 책을 뽑는 대신 이 지면에서 다루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쓰지 못한 책을 소개하련다.첫 책은 황루시의 〈뒷전의 주인공〉이다. 얼핏 봤을 땐 ‘뒷간의 주인공’인 줄 알았다. 뒷전이라면 흔히 ‘○○는 뒷전이고’ 하는 식으로만 썼지 이리 떡하니 앞으로 내세운 건 처음 봤다. 도대체 뒷전이 뭐지? 들어가는 글에서 친절하게 설명한다. 뒷전이란 굿판에서 “가장 마지막에 하는 굿”으로, “무속이 신앙하는 여러 신을 대접한 뒤에 철상을 하고 굿청 밖으 아이들의 무덤에서 시인은 접시를 깬다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시집이 드디어 번역돼 나왔다. 파블로 네루다의 스승이자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로 이름은 알고 있었으나 정작 그의 시는 알지 못했다. 10여 년 전 무너진 광산에서 69일 만에 구조된 칠레의 광부들이 그 캄캄한 시간 동안 미스트랄의 시를 외우며 버텼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시이기에 절망을 이길 힘이 됐을까? 그의 시선집 〈밤은 엄마처럼 노래한다〉(이루카 옮김, 아티초크)가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찾아 읽었다. 담백한 일상어로 쓴 시가 어렵지 않게 읽힌다. 몇 편은 동시 같 그 많던 전기차는 왜 사라졌을까?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과학 잡지 〈네이처〉의 최초 여성 편집장이자 유전학자인 막달레나 스키퍼는 얼마 전 한국에서 열린 포럼의 기조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근 120년간 노벨 과학상 수상자 600여 명 중 여성은 23명뿐이다.”(〈여성신문〉 10월19일자) 헉! 올해는 역대 세 번째 여성 경제학상 수상자인 클라우디아 골딘을 비롯해 물리학과 생리의학상, 평화상을 여성이 수상했기에 젠더 편향이 이리 심한 줄 잠시 잊고 있었다. 노벨상이 전부는 아니지만 지식 문화의 현재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임은 분명하다. 이 기준이 그토록 기울어져 있다는 것은 우리가 몰랐던 근대과학의 비밀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이불 빨래를 했다. 삭신은 쑤시지만 말간 햇볕에 이불을 널어 말리니 기분이 개운하다. 이참에 찌든 머릿속도 깨끗이 세탁해볼까. 뇌를 세탁하는 데는 과학책만 한 것이 없지. 카를로 로벨리의 〈보이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김정훈 옮김, 쌤앤파커스)를 펼친다. 몇 번이나 읽었는데 매번 새롭다. 내용을 기억하거나 이해하기엔 내 물리학 지식이 워낙 일천하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읽을 때마다 뇌가 놀라고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탈리아 출신의 이론물리학자인 카를로 로벨리는 일반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을 결합한 새로운 시각에서 현대 물리학의 최 세상이 내미는 외로운 손을 잡고 가을의 문장을 읽다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가을에는, 다른 계절엔 없는 문턱이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턱에 발을 찧고 눈물을 찔끔거린다. 올해도 어김없다. 찔끔, 눈물의 기미가 느껴지자 엉엉 울고 싶어졌다. 약속도 의무도 다짐마저 뿌리치고 오직 우는 것으로 일을 삼고 싶었다. 그래서 모두의 미움을 받는대도 상관없지 싶었다. 어차피 저물기 마련인 세월 아닌가. 울기로 들면 이유는 많았다. 무엇보다 내겐 가을의 수확이 없었다. 모든 계절을 종종걸음으로 지나왔건만. 나는 세상 가엾은 나를 위해 울 채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때, 멀고 먼 하늘에서 도착한 황야의 문장이 어깨를 두드렸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식민지 시기 소설가 현진건은 “몹쓸 사회가 술을 권한다”라고 했는데, 백 년이 지난 지금 사회는 개명해서 술 대신 자꾸 책을 권한다. 정부가 앞장서 역사·이념 논란을 부추기니 시민 노릇을 하려면 책을 찾아볼 수밖에. 지난봄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 제삼자 변제안을 내놓았을 땐 역사적·법적 근거를 확인하려 관련서들을 읽었다. 하지만 변제안이 법원의 결정으로 막힌 뒤에도 정부가 다른 해법을 모색하는 대신 오히려 독립운동가 홍범도의 위상을 문제 삼고, (오로지 독립군 토벌이 목적인)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의 친일 행적을 부정하며 논란을 만드 교실에서 희망을 보다,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이 지면에 타이완의 디지털부 장관 오드리 탕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기억나시는지? 그때는 다루지 못했지만 탕이 디지털 교육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디지털 기술보다 소양을 강조하면서, 중요한 건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는 게 아니라 “프로그래밍 사고를 배우는 것”이고, 이는 “하나의 문제를 몇 단계로 나눠 여럿이 함께 해결하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다(〈프로그래머 장관 오드리 탕, 내일을 위한 디지털을 말하다〉). 이 말은 현실이 되고 있다.타이완은 탕의 주도로 일찍이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을 시작했 강인하게 관대하게 자유롭게!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옆지기와 격렬하게 싸우던 어느 날, 먼지 쌓인 〈정신현상학〉을 꺼내 아무 데나 펼쳐 읽었다.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문장에 코를 박고 한 줄 한 줄 좇다 보니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 되면서 싸움을 계속할 명분도 의욕도 다 시들해졌다. 그걸로 싸움 끝. 이해도 화해도 없는 끝이지만 일단 끝나서 다행이었다.일상사의 파고에 휩쓸려 숨쉬기 힘든 이즈음, 그때 일이 생각나 시립도서관 한쪽에 마련된 철학실을 찾았다. 이해 불가능한 문장으로 악무한의 불만과 근심을 잠시 잊고 싶었던 것인데, 거기서 〈죽음은 최소한으로 생각하라〉라는 책을 만 빙하가 죽고 북극곰도 죽으면 다음은…?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더위를 이기자고들 한다. 임계온도를 넘어서면 살 수 없는 게 인간인데 무슨 수로? 더위는 이길 수 없다. 어디 더위만 그런가, 다른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지나기를 기다리며 잠시 피하거나 잊을 수 있을 뿐. 이길 수 없는 더위를 이기려 에어컨을 빵빵하게 트는 대신 내 안에 서늘함을 들여 잠시나마 더위를 잊어보면 어떨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납량 독서용 책을 골랐다. 제마 워덤의 〈빙하여 안녕〉이다. 차가운 빙하가 죽어가는 이야기이니 이보다 추운 책도 없지 싶은데.이 책을 만나기 전에 내가 애용하던 납량 도서는 두 가지다. 사진 예술 잘살고 싶으면 ‘왜?’를 물어라, 왜?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나가이 레이가 쓴 〈물속의 철학자들〉을 읽었다. 문어처럼 인지능력을 가진 수중생물 이야기인가 하고 펼쳤는데 아니었다. 철학 대화 활동가이면서 전문 연구자인 젊은 철학도가 “일상에 흘러넘치는 철학”에 대해 쓴 책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철학책,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읽다가 버스를 놓쳤다. 차를 놓칠 만큼, 놓쳐도 속상하지 않을 만큼 재미있었다.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처음 읽었을 때가 떠올랐다. 말꼬리를 잡는 소크라테스가 밉살맞으면서도 대화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해서 계속 읽었지. 맞아, 그때는 철학이 재미있었다. 왜 사는지, 왜 살아야 내 삶을 쓰는 것이 왜 위대하고 숭고한 일인가? [여여한 독서] 김이경 (작가) 열 장 남짓한 원고를 쓰는 데 열흘을 끙끙거렸다. 결과물을 보니 헛수고였다. 긴 한숨. 그러고 〈내 삶의 이야기를 쓰는 법〉이란 책을 펼쳤다. 저자인 낸시 슬로님 애러니는 45년간 ‘마음으로부터 글쓰기’ 워크숍을 운영하며 글쓰기를 가르쳤단다. 이 정도 경력자면 낙담한 나를 일으켜 세울 만한 몇 가지 팁을 알려주리라. 어쩌면 오래전부터 쓰고 싶었으나 못 쓰고 있는 내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큰 기대는 안 했다. 지금까지 몇 권의 글쓰기 책을 읽었지만 실전에 도움이 된 적은 없다. 오히려 귀한 조언들을 실천하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