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나가사키의 영주 나베시마 마고로쿠로는 한 민간 기업에 탄광이 있던 작은 섬 하시마(端島)의 소유권을 넘긴다. 당시 거래 금액은 10만 엔. 이 섬은 약 30년 뒤 해군 순양함 ‘도사(土佐)’를 연상시키는 노동자 집단 주거시설로 변모한다. 바로 ‘군함도’라 불리게 된 ‘초대형 굴라그(Gulag)’의 시작이었다. 한반도와 중국 대륙으로부터 온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피눈물을 삼키며 스러져갔다. 이 모든 일에 직접적인 책임은 지금도 일본 재계 굴지의 기업으로 군림하고 있는 미쓰비시 중공업과 그 핵심 생산기지인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이하 ‘나가사키 조선소’)에 있다.

ⓒ연합뉴스
ⓒ연합뉴스2015년 ‘메이지 시대 산업화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 군함도(맨 위)와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의 사료관에 있는 91식 어뢰 모형(위).

나가사키 조선소 한복판에는 원폭에도 파괴되지 않은 붉은색 벽돌 건물 하나가 서있다. 나가사키 조선소의 사료관이다. 건물 안쪽에는 ‘91식 어뢰’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데, “명중률 및 파괴력 면에서 세계 으뜸의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 어뢰는 미쓰비시 중공업의 ‘마스터피스’ 중 하나로, 진주만 공격 당시 미국 해군 주력함이던 애리조나 호를 침몰시키며 태평양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나가사키 조선소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야마토(大和)’로부터 연합함대 사령선의 자리를 넘겨받은 전함 ‘무사시(武蔵)’가 건조된 곳이기도 하다.

과거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의 대표적 부역 세력인 미쓰비시 중공업은 일본 패망 직후인 1946년 10월 연합군총사령부(GHQ)의 재벌 해체 정책으로 단죄를 받는 듯했다. 모든 임원이 사퇴하고 1950년 1월에는 동일본중공업, 중일본중공업, 서일본중공업의 3개 회사로 분할되었다. 하지만 시련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본을 ‘반공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미국이 회생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미국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에게 맥아더 총사령관 명의의 서간을 보낸다.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를 창설토록 하는 한편 1952년에는 무기 제조 금지 조치를 완화한다. 또한 재벌의 상호·상표의 사용을 금지한 조치도 해제한다. 동일본중공업은 미쓰비시 일본중공업, 중일본중공업은 미쓰비시 중공업, 서일본중공업은 미쓰비시 조선으로 간판을 다시 바꿔 단다. 전쟁 책임자의 공직 추방 조치도 유야무야된다. 그 결과 A급 전범 용의자 고코 기요시 전 미쓰비시 중공업 사장은 1953년 발족한 일본병기공업회 초대 회장으로 복권된다. 이 단체는 무기 생산 분야의 유일한 산업단체로 한국전쟁 특수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아베 정권의 무기 수출 3원칙 철폐로 급성장

그 뒤 미쓰비시 중공업은 한국(1980년대), 중국(2000년대) 등의 급성장으로 잠시 주춤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업합병, 해외진출 강화, 항공·우주·기계공업으로의 영역 확장 등 나름의 혁신을 거듭한다. 미쓰비시 중공업은 고부가가치 선박인 이지스함, 잠수함 등의 함정 제조 분야와 위성 발사 로켓 분야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유지해왔다.

ⓒEPA2016년 10월23일 일본 사이타마 현 아사카 훈련장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일본 자위대를 사열하고 있다.

“전쟁하는 나라 만들기”가 정책의 핵심인 제2기 아베 정권이 출범하면서 미쓰비시 중공업은 네 번째 부흥기를 맞이한다. 다른 세 번은 제1차 세계대전, 일본의 중국 침략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찾아온 부흥기였다. 2014년 4월 아베 정권이 결행한 무기 수출 3원칙(공산권, 유엔 결의 등에서 무기 수출을 금지한 국가, 국제분쟁의 당사국 또는 그 우려가 있는 국가로 무기 수출을 금하는 일본의 법령) 철폐는 미쓰비시 중공업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해 7월 패트리엇 2 미사일 목표 추적 장치의 미국 수출이 결정되었고, 10월에는 데이비드 존스턴 오스트레일리아 국방장관과 에토 아키노리 일본 방위장관이 소류급 잠수함(일본 해상자위대의 최신형 잠수함으로 16SS라고도 불린다) 기술이전에 합의했다. 미쓰비시 중공업은 이 두 품목의 생산이 가능한 사실상 유일한 업체였다. 같은 해 5월 게이단렌 무기 수출 세미나에서 ‘거대한 정책 전환’을 강조하며 “구체적인 정부 시책과 관민 협력”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던 오미야 헤데아키 미쓰비시 중공업 회장(게이단렌 방위생산위원회 위원장)의 야망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그리 낯설기만 한 광경’은 아니다. 이미 1기 아베 정권 시절인 2007년 3월 미쓰비시 중공업의 전임 회장인 니시오카 다카시가 “일본은 평화를 위해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취하고 있지만, 국제적 상식은 이와 정반대”라며 정권의 무기 수출 해금을 압박한 바 있다.

미쓰비시 중공업은 이후 일본 방위성과의 조달 거래 금액에서 부동의 1위를 점하고 있다. 2015년 들어 사상 최대 규모인 5조545억 엔으로 늘어난 일본 방위성 예산에는 이지스함 2척과 군사위성 개발 강화 비용이 포함되었다. 당시 자위대가 보유한 이지스함 6척 중 IHI(이시카와)가 건조한 1척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위성과 로켓의 자세 제어장치가 생산되는 곳 또한 나가사키 조선소였다. 심지어 미사일 수직 발사 장치와 어뢰도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만들어진다.

미쓰비시 중공업의 사업 부문은 군수 이외에도 에너지, 항공, 우주 등 다양한 첨단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미쓰비시 그룹은 자사 홍보 페이지에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책임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표명하고 있다. “국책이 명하는 바에 따라, 국민으로서 행해야 할 당연한 의무에 전력을 다한 것으로써, 돌이켜보았을 때 부끄러울 일은 아무것도 없다.” 군함도를 지배하던 ‘암흑 세력’은 여전히 반성 없이 건재하다.

기자명 홍상현 (〈게이자이〉 한국 특파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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