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여기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거듭 들었다. 9월8일 토요일, 인천시 동구 동인천역 북광장 앞에서 열린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는 축제의 장이라기보다는 증오범죄의 장이었다. 무지와 혐오감으로 무장한 이들이 광장을 점거하고 폭언과 폭행을 일삼은 탓에 많은 이들이 서로의 다름을 보고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공유하며 교양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재확인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대한민국 퀴어 인권운동사를 논할 때 두고두고 거론할 만한 그날의 혐오 폭력을 완성한 것은 몰지각한 신념을 앞세운 세력들이었으나, 그 ‘인권의 사각지대’를 조성해놓은 것은 다름 아닌 지자체와 경찰 그리고 국가였다.

구청은 개신교를 앞세운 지역의 극우 보수 단체들 눈치를 살피는 데에 급급해 이례적인 조건까지 붙여가며 축제 장소 대여를 불허하고 이를 공공연하게 광고했으며, 인권 유린의 현장에서도 구청 관계자는 자신의 몸을 피하기 바빴다. 인천지방경찰청은 조직적이고 흡사 용역작업 같은 집해 방해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도 모자라 가해 세력들과의 ‘원만한’ 해결을 주최 측에 강요했다. 인천동구청과 경찰이 이토록 천연히 ‘혐오의 톱니바퀴’로 기능한 것은 수년 동안 국민 간 합의를 운운하며 차별과 혐오를 방조한 국회와 정부가 있어서다. 이는 차별과 혐오의 구조적인 작동 원리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연합뉴스9월8일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그러나 축제는 무산되고 저지는 성공했다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날 축제에 참여한 이들은 폭력에 굴하지 않고 “우리는 여기에 있다”라는 방패를 들고 “사랑하니까 반대한다’”라는 혐오의 창을 뚫고 느릿느릿 전진해 축제를 마무리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날 그 ‘역사적인’ 현장을 직간접으로 목격한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SNS를 통해 ‘내년에는, 내년에도 간다’는 메시지를 힘차게 전했다.

그날, 축제의 한 페이지를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 ‘내 친구’는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보이지 않는 길을 걸으려 한다고 괜한 헛수고라 생각하진 말아요”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를 예정이었다. 모든 이의 모든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달라는 친구의 목소리는 가을 저녁 광장을, 두 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어도 좋은 긍지의 장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많은 이들이 머릿속에 그린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는 장엄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소박하고 일상적이었다.

그날, ‘차별금지법은 동성애 지지를 강요하는 독재법입니다’ ‘동성애는 치료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그들은 과연 어떤 축제를 머릿속에 그렸던 것일까?

그저 거기 있음으로 드러내려는 증명

한 존재가 그저 거기 있음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어떤 ‘포괄적인 차별’의 끝에서 얻어진 결론일까. ‘거기 있음’을 거부당하는 경험을 신의 뜻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일까. 묻고 싶다.

종교적·정치적 신념이 ‘음란’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광기라고 부른다. 그 광기 서린 음란의 망상이 ‘퀴어도 네 옆에서 운동을 하고 있어, 다 같은 사람이야’ ‘안아주는 것이 사랑입니다’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리 없다. 혐오의 망상은 그토록 무섭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에서 믿음을 믿음 삼아 ‘여성을 오직 자궁이라는 생식기관을 가진 도구’로만 여기던 ‘정상적인 광신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날 그곳에 있던 이들의 믿음은 저들의 믿음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들이 그들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음번 제물로 삼을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니 그 음란을 두 번 다시 확인하고 싶지 않다. 하여, 이 말을 꼭 덧붙이고 싶다.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