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핀란드 휘빈캐 시 ‘우수미’ 숲에 총성이 울렸다. 형광색 모자를 눌러쓰고 숲을 걷던 소피아 마티넨(20)이 걸음을 멈췄다. 10월22일 아침, 소피아는 휘리아(Hyria) 직업학교 낙농업 캠퍼스에서 1년마다 열리는 사냥 수업에 참가했다. 안전을 위해 학생들은 형광색 조끼와 모자를 썼다. 학생들은 숲을 에워싸고 나무 막대기를 두들기며 사슴과 야생소를 한곳으로 몰았다. 하지만 소피아의 주된 관심은 사냥보다는 동물 돌봄 분야다.

지난여름, 소피아는 휘리아 직업학교 동물 돌봄 과정에 입학했다. 그녀는 어릴 적 부모와 벨기에로 건너갔다가 지난해 핀란드에 돌아왔다. 소피아는 벨기에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영국에 있는 한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반려견을 좋아해 동물 돌봄센터에서 일하고자 직업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게 된 셈이다. 핀란드의 교육과정은 초·중등 의무교육 9년, 고등학교 3년, 대학 2~5년으로 이뤄져 있다. 대학뿐 아니라 직업 고등학교 과정에도 언제든 다시 입학할 수 있다.
 

ⓒ시사IN 김동인학생들이 농업용 트랙터를 정비하는 것도 수업의 일환이다.


소피아의 동급생들은 열다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 다양했다. 고등학생 소피아에게는 다양한 혜택이 주어졌다. 매달 200유로(약 27만원)가 들던 열차 비용은 학생 할인 혜택으로 43유로 정도면 충분했다(집이 있는 반타 시에서 기차를 타고 등하교한다). 학비와 급식비도 따로 내지 않는다. 소피아는 실습장비 일부만 구비했다.

소피아가 다니는 휘리아 직업학교의 우덴만카투 캠퍼스(Uudenmaankatu:각 캠퍼스가 위치한 거리명으로 별칭을 붙인다)는 고등학교지만 교육 내용은 한국의 전문대학과 비슷하다. 이곳 캠퍼스는 낙농업 과정이 특화되었다. 휘리아는 통합 종합 직업교육기관으로 한 해 예산만 4200만 유로(약 566억원)에 달한다. 지자체가 출연해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된다. 핀란드에서도 처음 시도하는 방식이다. 휘빈캐, 리히매키 등 4개 시에서 66% 이상을, ‘휘빈캐-리히매키 직업교육 재단’에서 나머지 33.26%를 출연했다. 주식회사이지만 지역사회 공공 교육법인이다. 두 도시에 위치한 메인 캠퍼스만 다섯 곳이고 인근 지자체에 위치한 작은 교육기관까지 합치면 모두 13곳에 캠퍼스가 분산되어 있다. 농업 과정을 배우려면 소피아가 다니는 우덴만카투 캠퍼스에, 케이터링(출장 연회) 서비스를 배우기 위해서는 카우팔란카투에 있는 캠퍼스에 다니면 된다. 휘리아 교육담당 부대표 에일레 사르시 씨는 “핀란드 다른 지역에도 통합형 학교가 있지만,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하는 곳은 휘리아가 처음이다. 올해 개교 5년 만에 교육부에서 선정하는 재정 우수 학교 후보로 꼽히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직업학교인 동시에 성인 재교육 기관

핀란드에서 이런 새로운 실험을 한 것은 직업교육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작은 교육기관을 하나로 묶어 공간을 활용하고, 학과를 통합했다. 휘리아는 직업계 고등학교인 동시에 성인 재교육 기관이다. 핀란드에서는 초기 직업교육(고등학교 과정)과 후기 직업교육(재교육 및 직무과정)을 통합해 운영한다. 단기 과정을 포함해서 한 해 8000여 명에 이르는 성인이 이곳에서 재교육을 받는다. 휘리아 운영본부가 있는 카우팔란카투 캠퍼스에는 성인 교육을 위한 시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10월22일 오후, 이곳 컴퓨터실에서는 회계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추가로 직무교육을 받고 있었다. 재취업을 위한 교육뿐 아니라 직무 보충교육도 휘리아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소피아처럼 3년 고등학교 과정을 밟는 2900여 명을 합하면 한 해 약 1만1000명이 휘리아를 거쳐간다. 휘리아가 위치한 휘빈캐-리히매키 지역 인구는 약 9만1000명. 사실상 인근 지역의 직업교육을 휘리아가 도맡는 셈이다.

소피아는 직업교육 3년 과정 중 6분의 1은 현장실습을 해야 한다. 현장실습 시간을 따져보면 한 학기 동안 현장에서 실습하는 한국 학생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이뤄지는 실습교육 시간에서 큰 차이가 난다. 학사 일정 중 기초교육이 20% 정도인데, 이 과정은 1학년 때 끝난다. 나머지 학점 대부분이 바로 교내 실습 과목이다. 소피아도 입학 2개월 만에 동물 우리를 만드는 실습을 했고, 가축 종에 대한 이론과 임업 및 원예 기초 과목을 공부한다. 한국의 교내 실습 과목이 산업 현장과 동떨어진 반면, 핀란드는 교내 실습이 산업 현장에서와 동일하게 이뤄지도록 캠퍼스 안에 각종 설비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소피아가 다니는 동물 돌봄 과정의 실습 시설만 보더라도, 3층짜리 건물 한 동이 뱀·앵무새·햄스터·이구아나 등 애완동물 돌봄 교육센터다. 소피아와 같은 과 3학년 재학생인 메르비는 “여기서 실습을 하면서 동물센터 같은 곳으로 파트타임 일을 나가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시사IN 김동인낙농업 과정이 특화돼 있는 휘리아 직업학교 우덴만카투 캠퍼스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사냥 수업이 열린다.

 


자동차 과목의 경우는 주로 농기계를 다루는데, 운전과 설비를 모두 가르친다. 자동차 수업이 진행되는 실습동에는 약 400㎡ 공간에 발멧(Valmet) 사에서 만든 3300㏄급 트랙터와 9인승 밴이 놓여 있었다. 벽에는 각종 장비가 마련되어 자동차 서비스센터 못지않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자동차 수업을 담당한 교사 마티 시타리 씨는 “이곳에서는 트랙터처럼 농사에 직접 필요한 전문 장비에 관한 수업을 진행한다. 농업 코스를 듣는 학생들도 필수적으로 정비 수업을 함께 듣는다”라고 말했다. 소피아도 매주 금요일 오전에 두 시간씩 트랙터 운전을 배운다.

휘리아를 보면 알 수 있듯 핀란드 직업교육 시스템의 중심은 학교다. 직업교육이 특성화 고등학교, 사설학원, 기업 연수시설 등으로 쪼개져 있는 한국과 달리 학교가 모든 직업교육을 담당한다. 그래서 핀란드에서 직업학교 졸업장은 자격증으로 통한다. 우덴만카투 캠퍼스 매니저(교장) 힐레비 코이부살로 씨는 “청소부로 직업을 전환하고 싶은 사람은 원래 하던 일을 하면서, 야간에 이곳에서 1년간 수업을 들으면 청소부 자격이 주어진다. 실업자도 실업급여를 받으며 여기서 수업을 받아야 자격을 얻는다”라고 말했다. 수업이 진행되는 건물에는 실제 호텔방과 똑같은 모델하우스가 꾸며져 있고, 각종 청소 기계와 용품이 실제 현장처럼 구비되어 있었다.

성인 재교육도 맡고 있지만 휘리아가 조금 더 공을 들이는 분야는 ‘초기 직업교육’인 고등학생들에 대한 훈련이다. 초기에 진로를 잘 잡아주어야 청년 실업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 청년실업률(15~24세)은 19.8%(2014년 8월 기준)로, 유로 지역 평균(23.3%, OECD 전체 평균은 14.7%)에 비해 낮다. 하지만 핀란드 25세 이상 실업률(7%)의 3배에 달한다. 20대 청년실업자 약 5만5000명 가운데 4만명가량이 중·고등 교육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한 것으로 핀란드 정부는 파악하고 있다.

 

 

 

ⓒ시사IN 김동인우덴만카투 캠퍼스에서는 교내 실습이 산업 현장과 동일하게 이뤄지도록 캠퍼스 안에 각종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학생들이 외양간을 관리하는 것도 수업의 일환이다.

휘리아에 담임교사가 따로 없는 이유

청년실업률은 높지만 핀란드 사람들은 얼마든지 패자부활전이 가능하다. ‘취업은 각자 해결해야 한다’는 한국과 달리 정부가 손을 놓고 있지 않다. 청년실업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핀란드 정부는 2013년 1월부터 ‘청년보장제(The Youth Guarantee)’를 시행 중이다. 25세 이하 학생이나 30세 이하 실업자에게 직업학교를 기반으로 3개월간 교육, 워크숍, 노동시장에서의 재활 등을 제공하는 형태다. 이 같은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고, 청년 교육을 관리하는 핵심 기관이 휘리아 같은 직업학교다.

휘리아에서 처음 선택한 학과를 정상적으로 졸업하는 비율은 70% 정도다. 휘리아만의 현상은 아니다. 핀란드 전국 평균 직업학교 이탈률은 약 25%다. 낙오자들을 위해 휘리아에서는 패자부활전 교육을 한다. 애초 진학한 과정이 적성에 맞지 않다면 다른 과정으로 바꿀 수 있다. 과정을 바꾸지 않고 직업학교를 벗어난 낙오 학생도, 학교는 지속적으로 접촉하며 관리한다.

핀란드 청소년은 읽기와 수학·과학을 평가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한국과 1, 2위를 다툰다. 그러나 주당 공부 시간을 따져보면 한국은 OECD 평균인 35시간을 훨씬 넘어 50시간 가까이 되지만 핀란드는 30시간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은 주로 상위 1%에 맞춘 교육이지만, 핀란드는 하위 1%에 맞춘 교육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상위층 위주 교육이 아니라 낙오자를 줄이는 교육이라는 철학은 직업교육에서도 똑같이 유지된다.

 

 

 

 

 

ⓒ시사IN 김동인직업학교 진학률이 일반고보다 높다. 목공 과정 1학년에 다니는 세니아(위) 역시 취업을 선택했다.

 

휘리아에는 우리와 같은 ‘담임교사’가 없다. 대신 ‘진로 상담 교사’가 진로교육 분야를 따로 책임진다. 우덴만카투 캠퍼스 진로교육 교사인 메르야 씨는 학생들에게 진로 정보를 알려주고, 맞춤학습 과정을 설계해준다. 메르야 씨는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은 자기 삶을 찾는 것이다. 학생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찾도록 일일이 컨설팅해준다”라고 말했다. 선택은 학생 각자가 한다. 휘리아 학교에서 목공 과정 1학년에 재학 중인 세니아 신코는 남학생이 대다수인 목공반에서 남학생과 동등하게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세니아는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집을 짓고 고치는 일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세니아는 기초학교 성적이 우수했지만, 대학에 가서 관련 학과에 가기보다는 곧바로 일을 하고 싶어서 휘리아를 선택했다.

세니아나 소피아 같은 경우가 많다 보니 핀란드 교육계 일각에서는 ‘일반계 고등학교를 가려는 학생이 너무 줄어 걱정이다’라는 행복한 푸념이 나온다. 휘빈캐 시 교육 담당 고위공무원이자 시장 대리를 맡고 있는 펜티 할로넨 씨는 “직업학교와 일반고를 가는 비중이 최근에는 55대45 정도다. 내 딸도 직업학교로 진학했는데, 내심 대학에 갔으면 해서 야간 코스로 일반계 수업도 같이 이수하게 했다.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졸업 후 곧바로 취업했다”라고 말했다. 핀란드 청소년들이 대학 대신 직업학교를 더 선호하는 데는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임금 격차가 심하지 않다는 점이 작용한다.

한편 일반계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대학에 갈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다. 핀란드에서 대학은 본고사를 치러야 들어갈 수 있는데, 여기서 요구하는 일부 수업을 들었다면 직업학교 졸업생도 응시할 수 있다. 또한 직업교육 학생의 경우 폴리텍(기술 전문대학)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도 많다. 휘리아 학교 사르시 부대표는 “핀란드에서는 중소기업 사장들이 대부분 직업학교 출신이다. 직업학교를 졸업하고도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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