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풍경은 이렇다. 1982년 3월27일. 서울 동대문구장에서 한국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이 열렸다.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경기였다. 유창순 당시 국무총리를 비롯해 3부 요인이 참석했다. 유창순 총리는 개막 연설에서 “규칙의 경기인 야구를 통해 우리 국민이 규칙을 더욱 잘 지키는 국민이 되고, 야구를 통해 우리 사회가 함께 웃고 즐기는 명랑사회가 되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구는 군사정권의 권력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나섰다. 서울극장에서는 성인 영화 〈애마부인〉이 상영되고 있었고, 신문 사회면에는 그 며칠 전에 벌어진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에 대한 소식이 톱뉴스로 실렸다. 어두운 시대,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려는, 정통성이 취약한 정권의 ‘3S 정책(Sex·Sports·Screen)’이라는 말이 바람결에 떠돌았다.

ⓒ시사IN 안희태원년에 140만명이었던 관중은 지난해 590만명에 달했다.

개막전 당일. 시대의 엄혹한 공기와 무관하게 야구장 안은 열기로 가득했다. “데모 말고 그 당시에 그 수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행사가 어디 있었겠느냐”라는 한 야구 기자의 말처럼 흥행에 성공했다. 10회 말까지 7대7로 팽팽하던 경기는 MBC의 이종도 선수가 삼성 이선희 투수의 공을 펜스 밖으로 날려 보내며 끝났다.

끝내기 만루 홈런으로 시작한 한국 프로야구는 30년 동안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가장 두드러진 성장은 관중 수. 원년에 140만명(경기당 6000여 명)이 야구장으로 모여들었고 지난 시즌에는 590만명(경기당 1만1000여 명)이 야구장을 찾았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올해 처음으로 600만 관중을 돌파하리라 예상한다.

〈시사IN〉은 야구 담당 기자들에게 한국 프로야구를 움직인 감독·선수·구단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다. 현장에서 야구 열기를 체험한 야구 담당 기자 30명이 답변에 응했다. 응답자는 중앙 일간지, 방송사, 스포츠 일간지, 인터넷 매체 등에 골고루 분포해 있다.

ⓒ연합뉴스군사정권은 1980년대 초반에 프로 스포츠 창설을 주도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1982년 프로야구 개막전 시구자(위)로 나섰다.
먼저 ‘그라운드의 지휘자’ 감독에 대해 물었다. 현역을 포함해 역대 감독 가운데 가장 뛰어난 감독으로는 김응룡 감독과 김성근 감독이 꼽혔다. 감독은 성적으로 말한다. 김응룡 감독은 해태 타이거즈에서 9회, 삼성 라이온즈에서 1회 등 한국시리즈에서 10회 우승한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승부사다. 2004년에는 야구 경기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구단 사장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야구 스타일은 선이 굵었다. 이순철 해설위원의 표현을 빌리면, 지극히 간단한 말을 던지며 ‘경기의 맥만 짚어가는’ 스타일이다.

현역 최고 감독은 ‘야신’ 김성근

현역 최강은 ‘야신(야구의 신이라는 뜻)’ 김성근 감독이다. 야구 기자 30명 가운데 28명이 그를 꼽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가 김응룡 감독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 후반은 지난해 SK 와이번스를 우승으로 이끈 김성근 감독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그의 야구 스타일은 김응룡 감독과 판이하다. 투지를 강조하는 ‘지옥 훈련’과 꼼꼼한 ‘데이터 야구’. 전성기가 달랐던 만큼 ‘두 사람이 지금 맞붙었다면’ 하고 아쉬워하는 야구인이 많다.

이 두 사람에 이어 2002년 아시안 게임(금메달),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준우승) 등 국제 대회에서 강한 면모를 보인 김인식 감독을 명장으로 꼽는 이가 많았다. 초창기 야구 시대를 엿볼 수 있다는 뜻에서 백인천 감독과 김진영 감독을 예로 드는 이도 있었다. 백인천 감독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다 MBC 청룡의 창단 감독 겸 선수로 출전했다. 프로야구 역사상 깨지기 힘들 것으로 보이는 4할대 타율(0.412)로  원년 타격왕에 오르기도 했다. 김진영 전 삼미 감독은 심판진에 지나치게 항의해 구속되는 불상사까지 겪었다. 때마침 텔레비전을 지켜보던 전두환 대통령의 한마디가 구속을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고 불린다. 그만큼 투수의 비중이 크다. 게다가 투수 라이벌의 존재는 흥행을 자극한다. 김응룡 감독과 김성근 감독이 지도자의 용호상박이라면, 역대 투수 라이벌로는 ‘국보급 투수’로 불리는 선동렬 선수와 ‘무쇠팔’ 최동원 선수가 꼽힌다. 설문조사에 응답한 야구 기자 30명 전원이 역대 최강 투수로 선동렬 선수를 꼽았다. 정규 시즌 MVP 3회, 다승왕 4회, 방어율왕 8회, 구원왕 2회, 탈삼진왕 5회, 3년 연속 트리플크라운(다승·평균자책점·탈삼진) 등 그가 남긴 성적은 한동안 다른 이가 넘보기 힘들 정도이다. 0점대 방어율을 3번이나 기록하기도 했다(1986년 0.99, 1987년 0.89, 1993년 0.78). 대학가에 우스갯소리로 ‘선동렬 학점’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선동렬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야구의 최고 투수로는 최동원이 꼽혔다. 150㎞가 넘는 강속구를 던진다고 해서 ‘무쇠팔’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그는 1984년 한국 시리즈에서 혼자서 4승을 거두어 롯데 자이언츠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선동렬 선수와 현역 시절에 세 차례 선발 맞대결을 벌였다. 1986년 4월 첫 맞대결에서는 선동렬이 1대0으로, 그해 8월의 두 번째 대결에서는 최동원이 2대0으로 승리했다. 1987년 5월 마지막 대결에서는 둘 다 15회 완투를 하며 2대2 무승부를 기록했다. 1승1무1패의 명승부였다.

올 시즌 최고 라이벌은 류현진·김광현 투수

1988년에 최동원 선수가 선수협의회를 결성하는 데 앞장서고(구단들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트레이드되는 등 오랫동안 야구계에서 불이익을 받았던 점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위안을 삼자면 이 전설의 대결이 스크린에서 부활할 예정이라는 것. 영화 〈퍼펙트 게임〉(가제)에서 배우 양동근이 선동렬 역을, 조승우가 최동원 역을 맡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 송진우, ‘한국 프로야구의 대표적 좌완 투수’로 오스트레일리아 리그에서 뛰고 있는 구대성, ‘22연승 신화의 주인공’ 박철순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았다. 역대 최다승(210승) 기록을 갖고 있는 송진우 선수는 1999년 프로야구선수협회를 만들고 초대 회장을 맡아 ‘영원한 회장님’으로 불렸다.

‘우완 투수’ 선동렬과 최동원의 시대가 있었다면 ‘좌완 투수’ 류현진과 김광현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야구 기자의 평가에서는 류현진이 다소 앞섰다. 인천 동산고 출신인 류현진은 고향팀 SK로부터 1차 지명을 받지 못해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고, 그해부터 꽃을 피웠다. 다승(18승), 평균자책점(2.23), 탈삼진(204개)에서 모두 1위에 오르며 사상 처음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휩쓸었다. SK가 땅을 칠 일이었다. 그는 지난해 방어율(1.82), 탈삼진(187개)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

 

그 다음 해에 SK가 1차 지명한 선수가 김광현 투수였다. 데뷔 해였던 2007년에는 프로의 벽을 절감했다. 3승7패로 성적이 저조했다. 그러다가 2008년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16승4패. SK 와이번스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지난해에는 17승으로 류현진을 제치고 다승왕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방어율과 탈삼진에서는 류현진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두 사람에 이어 윤석민, 오승환(삼성), 봉중근(LG) 등이 거명되었다. 윤석민은 지난해 부상 등 여러 이유로 부진했으나 올 시즌 부활이 예상되는 KIA의 에이스로 평가받았다. 선발-중간계투-마무리로 투수가 분업화하면서 2000년대 이후 20승을 거둔 투수가 드문데, 류현진·김광현·윤석민이 20승 이상을 거둘 가능성이 높은 투수로 평가되고 있다.

역대 타자 부문에서는 이승엽 선수를 꼽는 야구 기자(24명)가 가장 많았다.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타격에 시동을 걸더니 2003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개인 시즌 최다 홈런(56개)을 기록했다. 그해 롯데와의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홈런을 쳐 일본의 오 사다하루(왕정치)가 갖고 있던 아시아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55개)을 제친 것이었다. 이 기록을 끝으로 그는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이승엽 다음으로는 이종범(13표), 백인천·장종훈·장효조(9표), 양준혁(8표), 김성한(5표)의 이름이 이어졌다.

제9구단 창단 등 숙제도 많아

현역 타자로는 이대호(25표), 김현수(23표), 김동주(14표), 홍성흔(7표), 정근우(5표) 순으로 주목받았다. 롯데 자이언츠의 이대호 선수는 지난해 도루를 뺀 타격 7개 부문에서 1위를 기록했다.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타격 7관왕으로 현역 최고 타자로 떠올랐다. 김현수는 프로에 입단해 만개한 경우다. 발이 느리고 근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 프로 팀의 지명을 받지 못해 신고 선수로 2006년에 입단한 그는, 2008년 타격왕에 오르며 설움을 씻어냈다. 팬들은 그에게 ‘4못쓰(4할도 못 치는 쓰레기)’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가 3할대를 치는 것은 당연하고, 4할을 쳐야 한다는 기대감이 담겨 있다.

 

프로 스포츠의 생명은 선수들의 경기력과 팬에 달려 있다. 관중을 모으는 힘, 구단의 마케팅 능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야구 기자들은 마케팅을 잘하는 구단으로 SK(27표), 두산(19표), LG(10표), 롯데(4표) 순서로 꼽았다. SK 와이번스 하면 ‘스포테인먼트’를 떠올린다.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를 합한 말이다. 경기를 보면서 삼겹살을 구워먹을 수 있는 바비큐존을 구장에 설치하고, 가족 단위 팬을 고려해 야구장에 유아 놀이시설도 준비했다. 

프로야구 30년. 축포만 터뜨리기에는 앞으로 남은 숙제도 많다. 가장 먼저 닥친 일은 새 구단 창단 작업이다. 창원을 연고로 하는 제9구단(엔씨소프트)이 빠르면 2013년, 늦어도 2014년까지 합류한다. 팀 간 전력 차가 지나치게 클 경우, 흥행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 지은 지 50∼60년이 넘고 수용 규모가 작은(1만명 규모) 몇몇 야구장 시설도 골칫거리다. 그나마 광주와 대구에 야구장을 신축하기로 하면서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분위기다. KBO와 구단 그리고 선수협회가 합리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4월2일, 2011년 시즌이 개막한다. 야구 담당 기자들은 올해 우승권에 가장 근접한 팀으로 SK(27표), 두산(22표), KIA(9표), 삼성(2표)을 꼽았다. 그 예상이 들어맞을지, 아니면 이변이 일어날지 팬들은 즐겁게 지켜볼 따름이다. “플레이 볼!” 주심의 외침을 시작으로.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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